[스포츠아시아=반재민 기자] 모든 이들이 축복받을 크리스마스, IFBB 프로에서 또 하나의 별이 졌다. 전 IFBB 프로 피규어 선수인 잔나 로타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39세의 젊은 나이였다.

피트니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이 선수에 대해서는 모를 수 있다. 하지만, 로타는 2000년대 초반 IFBB 프로 선수로서 여성 피트니스계에 기여했으며, 유년시절의 시련을 운동으로서 극복해낸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더욱 애석하게 느껴진다. 서른 아홉의 나이에 짧지만 강렬했던 인생을 살다간 잔나 로타의 삶을 조명해보려 한다.

■ 우크라이나에서 미국으로, 시련을 극복해낸 승리자

1980년 우크라이나의 체르니프치에서 태어난 잔나 로타는 유년시절에는 그저 평범한 우크라이나 소녀였다. 하지만, 그가 16살이 되던 해인 1996년, 우크라이나의 정세는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했고 결국 우크라이나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 처음 발을 딛게 된 나라 미국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음식부터가 문제였다. 당시 우크라이나에서는 거의 모든 식품이 유기농이었지만, 미국은 달랐다. 그것부터가 로타에게는 큰 난관이었다. 

식품뿐만 아니라 언어도 그에겐 큰 문제가 되었다. 로타는 영어를 전혀하지 못했고, 6개월 동안 그는 미국 학교에서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한 채 허송세월했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아무것도 말을 할 수 없다보니 친구들의 장난에도 대응하지 못했고, 점점 위축되어갔다.

"저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단지 매일 수업에 들어가서 선생님이 입만 뻥끗거리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죠. 특히 역사 수업에서는 정말 어려웠습니다."  

좋지않은 성적과 적응 실패에 낙담한 로타는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에 찾아가 음식을 먹으며 스트레스를 풀었고, 로타의 몸무게는 10kg 가까이 늘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체조와 춤을 전공했던 그에게 체중증가는 좌절 그 자체였다. 그의 첫번째 실패였다. 

하지만, 좌절을 딛고 로타는 한걸음 한걸음 자신의 길을 내딛기 시작했다. 우선 영어를 먼저 배우기 시작했다. 주말도 거르지 않고 영어 배우기에 몰입한 로타는 선생님의 도움 덕택에 6개월 남짓한 시간만에 영어와 포르투갈어 등을 마스터했다. 그리고 대학교에 진학한 로타는 그녀의 인생을 결정할 중요한 변곡점을 만나게 된다.

■ 영양학, 그리고 IFBB 프로의 시작

천신만고 끝에 대학생이 된 로타는 정치학을 주전공으로, 영양학을 부전공으로 하여 대학교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패스트푸드로 얻은 살을 빼기로 결심한 로타는 곧바로 선수들의 산실인 시애틀의 골드짐으로 들어가 개인훈련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운동은 단순히 살을 빼는 것의 차원을 넘어서 피트니스 선수로 미국에서 성공을 이뤄내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18살 시절 그와 함께 운동을 했던 타메르 엘 긴디 머슬컨테스트 CEO는 당시를 회상하며 “잔나는 순수한 아이였다. 그는 아름다웠고, 그의 꿈은 매우 컸다. 미국에서 성공해 우크라이나로 돌아가 대통령이 되어 그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정말 순수한 영혼을 갖고 있었다.”라고 이야기했다. 잔나에게 있어서 운동은 성공을 향한 첫 관문이나 마지막 관문이었던 것이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로타의 전공은 영양학이었고, 식단에서 철저한 관리를 할 수 있게된 로타의 몸은 나날이 발전해나갔다. 잡지에서 피규어 선수인 모니카 브랜트의 사진을 보고 선수의 꿈을 키워나간 로타는 마침내 스무살이 되던 2000년 워싱턴에서 열렸던 에메랄드 컵에 출전해 피규어 부문 9위를 차지하는 호성적을 거뒀다. 이어서 2002년 엠파이어 클래식 체급 1위, 2003년 노던 골드 클래식 오버롤, 에버그린 스테이트 챔피언십 1위 등 미국 국내 대회에서 점점 좋은 성적을 올리며 그의 꿈은 커져갔고, 마침내 2005년 NPC 주니어 내셔널에서 2위를 차지하며 IFBB 프로카드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복근과 밸런스 있는 근육은 많은 이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고, 프로 이후 원숙미를 더한 로타는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프로 대회에 출전하며 IFBB 프로 피규어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아마추어에서 프로가 된 그에게 프로의 벽은 높았다. 2006년 캘리포니아 프로 피규어 10위를 시작으로, 션 레이 콜로라도 프로 10위, 샌프란시스코 프로 4위로 연착륙 하는 듯 했지만, 이듬해인 2008년에는 토너먼트 오브 챔피언스에서 9위, 캘리포니아 스테이트 프로 챔피언십에서는 12위에 오르며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절치부심으로 2009년을 보낸 후 2010년 출전했던 머슬컨테스트 프로에서도 12위에 머무른 로타는 2011년 머슬컨테스트 출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사실상 마무리했다. 이미 본인이 운영하고 있던 골드 짐의 규모가 커져있었고, 사업과 선수로서의 일을 동시에 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한 로타는 골드 짐의 오너로서 그리고 트레이너로서 선수들 양성에 주력해왔다. 

■ 크리스마스에 찾아온 비극, 허무하게 가버린 피규어의 별

무대를 떠나 사업가로서 코치로서 바쁘게 살아가고 있던 2019년 12월, 큰 비극이 그를 덮쳤다. 외부일정을 위해 어바인에 위치한 자신의 집을 나온 로타는 아파트 옆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맹렬하게 달려온 차량이 로타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치어버리고 말았다. 로타는 차에 치인 후 떨어지면서 아스팔트에 머리를 크게 부딪혔고,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뇌사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생명유지장치에 의존해 힘겹게 생명의 끈을 놓지 않은 로타는 더 이상 호전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의료진과 가족들의 결정으로 크리스마스인 2019년 12월 25일 그의 가족들과 지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산소호흡기를 떼며 세상과의 작별을 고했다. 미국의 대축제인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비극 앞에 미국 피트니스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NPC의 회장이자 IFBB 프로의 수장인 짐 매니언은 성명서를 통해 “이 비극적인 시기에 그의 가족들에게 조의를 표한다. 우리의 생각과 기도는 그의 가족, 친구들과 같다. 그는 너무 빨리 가버렸다. 평화 속에서 잠들길.”이라는 메시지를 통해 로타의 명복을 빌었다.

■ 치열했던 삶을 살았던 피트니스의 영웅을 기리며

우크라이나에서 이역만리 미국에 이르기까지 그는 일주일에 7일, 하루에 12시간을 일하면서도 에너지 넘치는 태도를 유지했다고 주변 사람들은 그가 이뤄놓은 업적과 성공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에너지가 넘쳤던 이유는 운동이 인생에서 아주 쉬운 일이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미 청년기의 시련을 통해 그는 긍정적인 태도를 가졌으며,  자신이 정한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진취적인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그는 에너지 넘치는 힘으로 자신의 성공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 에너지는 자신의 삶을 사는 방식이었고, 사람들은 그의 에너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불꽃처럼 살다 나비처럼 사라진 로타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며, 그가 고통이 없는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기를 바란다.

사진=잔나 로타 공식 SNS
반재민 기자(press@monstergroups.com)